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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드라이버 정리 1탄 '아일톤 세나' (데뷔, 성적 및 업적, 사고)

by byfire 2025. 7. 10.

아일톤세나 사진

이번 글에서는 F1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드라이버로 손꼽히는 인물 중 하나인 '아일톤 세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984년부터 1994년까지 햇수로 10년을 활동한 전 F1 드라이버인 세나는 브라질 출신의 전설적인 레이서입니다. 

그가 보여준 놀라운 경기력과 경기장 밖에서의 모든 행동들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면서 아직 까지도 그를 역대 최고의 드라이버라고 엄지를 들게 만듭니다.

세나의 F1 데뷔 과정, 주요 성적 및 업적, 그리고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나의 F1 입문과 초기 커리어

아일톤 세나는 1960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카트 레이싱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1981년 유럽으로 건너간 그는 브리티시 F1600 시리즈와 F3 챔피언십을 석권하며 주목받는 유망주로 성장했고, 1984년 F1 무대에 토올먼(Toleman) 팀 소속으로 데뷔하게 됩니다.

그의 데뷔 시즌은 신생팀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퍼포먼스를 보여준 해였습니다.

특히 1984년 모나코 그랑프리는 그의 전설이 시작된 무대로 평가됩니다. 당일은 폭우로 인해 서킷이 젖어 있었고, 대부분의 드라이버가 속도를 줄이는 상황이었지만 세나는 달랐습니다.

그는 폭우 속에서도 놀라운 집중력과 감각으로 차량을 제어하며 13위에서 시작해 2위까지 치고 올라왔고, 당시 최고의 드라이버였던 알랭 프로스트를 맹추격했습니다.

비록 경기 도중 우천중단으로 인해 우승은 놓쳤지만, 세나의 이 경기는 전 세계 F1 관계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며

‘레인 마스터(Rain Master)’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당시에 경기를 중단했던 재키 익스는 레이스 심판인 스튜어드와 상의를 하지 않았다는 의혹과 왜 레이스를 중단했는지 많은 의혹을 받았고 당시 우승을 차지한 알랭 프로스트와 같은 프랑스 출신임을 지적하는 팬들도 많았습니다만

악조건 속에서도 탁월한 트랙 감각과 컨트롤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세나는 이후에도 우천 경기에서 유독 강한 면모를 보여주며 레인 마스터라는 명성을 더욱 굳혔습니다.

바로 다음 해인 1985년에는 로터스 팀으로 이적하여 첫 번째 폴 포지션과 우승을 기록했고, 이후 매 시즌마다 인상 깊은

성적을 올리며 톱 드라이버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압도적인 기록과 레이싱계의 유산

아일톤 세나는 총 161번의 그랑프리에 출전하여 41번의 우승, 65번의 폴 포지션, 80번의 포디움을 달성했습니다.

특히 폴 포지션 기록은 그가 은퇴할 때까지 F1 최다 기록이었으며, 그의 퀄리파잉 실력은 여전히 회자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역대 폴 포지션 획득 종합 3위)

다만, 아직 최다연속 폴 포지션 (8회)의 기록은 아직도 역대 최대입니다.

세나가 선수생활을 몇 년만 더 지속했으면 더 엄청난 성적이 기록될 텐데 참 아쉬운 부분입니다.

 

아일톤 세나는 톨먼 > 로터스를 거쳐 > 88년 말보로 맥라렌으로 이적합니다.
그는 1988년, 1990년, 1991년 총 3회의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며 맥라렌-혼다와 함께 황금기를 누렸습니다.

이 시기에 펼쳐진 알랭 프로스트와의 라이벌 구도는 F1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경쟁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당대 최고였던 두 드라이버는 같은 팀 소속으로서 내부 경쟁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팀 내 정치 싸움과 긴장감이 극대화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1989년 일본 GP에서의 충돌 사건은 두 사람의 갈등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팬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자주 회자되는 명장면입니다.

세나는 경기 외적으로도 존경받았습니다. 특히 브라질 내에서 그는 단순한 스포츠 스타를 넘어, ‘국민 영웅’으로 불렸습니다. 당시 브라질은 경제 불안과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는데, 세나의 국제적 성공과 격정적인 레이스는 국민들에게 하나의 희망이자 자존심으로 작용했습니다. (IMF때의 박찬호, 박세리를 연상하게 되죠)

그는 항상 브라질 국기를 들고 우승 세리머니를 했으며, 그 장면은 많은 브라질 국민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이름을 딴 ‘아일톤 세나 재단’을 세워 브라질 내 저소득층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과 복지 사업에 기부를 아끼지 않았고, 많은 국민에게 사랑받았던 만큼 이 재단은 현재까지도 유지되며, 수많은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1994년 이몰라, 비극의 날과 그 후의 변화

1994년 5월 1일, 이탈리아의 이몰라(Imola) 서킷에서 열린 산마리노 그랑프리는 F1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 날로 기억됩니다. 윌리엄스-르노 소속으로 출전한 아일톤 세나는 경기 중 7랩째 ‘탬버렐로 코너(Tamburello)’에서 차량이 벽에 고속으로 충돌하며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사고는 수많은 F1안전 규정의 문제점을 드러냈습니다. 경기 전날 루벤스 바리첼로의 중상, 예선 중 롤란드 라첸버거의 사망 등 연속적인 사고들이 이어졌으나, 당시의 F1은 안전 규정은 지금처럼 엄격하지 않았습니다. 세나 역시 전날 사고들로 인해 마음이 무거운 상태였고, 경기를 강행해야 했다는 심리적 부담감도 컸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세나의 차량은 스티어링 컬럼 결함으로 인해 조향 불능 상태에서 벽에 부딪혔고, 충돌 시 튀어나온 서스펜션 부품이 헬멧을 관통하면서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를 넘어, 모터스포츠 역사 전체에 깊은 충격을 안겼습니다.

이후 FIA는 F1 안전 규정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게 됩니다.

  • 서킷 구조 개선: 위험 구간에 광폭 런오프 존, 에너지 흡수형 배리어 설치
  • 차량 디자인 강화: 운전석 보호 강화, 서스펜션 부품 차단 설계 도입
  • 헬멧 및 장비 기준 향상: HANS 장치 도입, 내충격 기준 상향
  • 트랙 의료 시스템 개선: FIA 의료 카, 트라우마 전문 의료진 배치

이러한 변화는 F1 역사에서 ‘세나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정도로 큰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수십 년 동안 드라이버 사망 사고는 극도로 줄어들게 됩니다. 세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의 목숨으로써 모터스포츠의 안전 문화를 바꾼 상징적인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아일톤 세나는 단순한 F1 챔피언이 아닌, 인간적인 매력과 철학, 그리고 기술적 완성도를 모두 갖춘 불세출의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고 이후 브라질은 3일간 국가 추모 기간을 선포했고, 그의 시신은 이전 대통령의 전용기로  이송되고 장례식은 생중계가 되었으며 수많은 레이싱 관계자들도 참석했습니다.

이 선수의 곁에 묻히고 싶다며 자살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사랑을 받았던 아일톤 세나였습니다.

94년도 미국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우승했을 때

SENNA... ACELERAMOS JUNTOS, O TETRA E NOSSO! (세나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해 줘)

라는 글귀를 들어 그를 추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전 세계 팬들에게 다른 누구보다 최고의 드라이버를 뽑을 때 그의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그가 남긴 유산은 오늘날의 F1이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브라질 국민뿐만이 아닌 모든 팬들이 사랑했던 아일톤 세나의 이야기였습니다.